화차도설을 쓴 국방과학의 선구자

며칠 추운 날씨가 풀려 봄 기운을 느낄 정도의 겨울이다.

하늘은 청명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봄을 재촉하는 날에 장성의 의병을 만나러 간다.

국도 1호선이 지나가는 장성은 새로운 도로들이 들어서서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추수가 끝난 남도 들녘을 지나 장성을 찾아가는 길은 마음이 단단해진다.

남도의 학자들을 가장 배출한 지역이기에 더욱 그렇다.

흔히 장성을 이야기할 때 문불여 장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장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라는 뜻이다. “

장성에 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 때문인지 장성은 흔히 문인의 고장, ‘문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문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성에는 여러 서원과 사당이 남아 있다.

우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신 필암서원이 유명하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평가받는 노사 기정진 선생을 모신 고산서원도 있다.

이 외에도 가산서원, 모암서원, 만곡사 등이 남아 있다.

국방 과학의 선구자, 화차를 개발하여 임진전쟁에 기여한 망암 변이중 의병장을 만나러 가보자.

장성 봉암서원의 변이중 행적

장성의 봉암서원은 망암 변이중(1546~1611) 선생의 학행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97년에 세웠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된 후, 1984년에 새로 복원했다.

봉암서원은 변이중 외에도 변경윤·윤진·변휴·변윤중을 추가하여 현재 다섯 사람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다.

과연 몇 백년간 서원에도 배향되었을 정도의 인물이었던 변이중은 어떠한 행적을 지니고 있었을

▲봉암서원(전남 장성군 장성읍)
▲봉암서원(전남 장성군 장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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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로 행주대첩 승리 이끈 조선의 선비 과학자

변이중은 1546(명종 1)에 장성군 장암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망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특히 변이중이 이이를 찾아 배움을 청할 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이이는 극구 칭찬하면서요즈음 망암을 따를만한 선비가 없겠다.”라고도 했다.

변이중은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사헌부 감찰, 공조좌랑, 성균관전적, 황해도 도사, 풍기군수, 함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변이중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의 일화가 있다.

송사를 일으킨 사람이 권세가와 결탁하여 수십 년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있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변이중이 부임하던 날에 바로 법에 따라 결정을 내려버렸다.

이를 알게 된 관찰사가 수차례 부탁을 했지만 변이중은 끝까지 온정에 휩쓸리지 않고 법을 관철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변윤중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200필의 말을 마련해 선조의 파천을 도왔다.

또한 그는 선조에게 세 차례에 걸쳐 임진왜란 평정의 계책을 상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 본 선조는 특명으로 변이중을 전라도 소모사로 임명하여 군량미와 의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특히 변이중은 전라도에 소모사로 내려와 있던 4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300량의 화차를 제작해 이중 40량을 바닷길을 이용하여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에게 보내기도 했다.

변이중 화차의 특징은 문종화차를 개량해 신기전이나 사전총통 대신 승자총통을 장착해 화력과 살상력을 높이고 군사를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을 설치한 것이다.

또 문종화차는 한 방향으로만 발사 할 수 있는데 비해 전면과 좌·3면에 승자총통을 장착하여 실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그가 총통화전도설화차도설에 의거하여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변이중 화차의 복원 모습
▲변이중 화차의 복원 모습

변이중의 사촌 동생, 변윤중의 의병 활동

변이중이 임진왜란 당시 300량의 화차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장성의 만석꾼이었던 사촌 동생 변윤중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변윤중 또한 의병 활동을 하며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변윤중은 평소 거느린 하인들과 장정 200여 명과 함께 장성현 장안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변윤중은 며칠 간의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지만, 1만 명의 일본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정들을 잃은 변윤중이 피를 흘리면서 마을에 돌아오자 마을 노인들은 빨리 몸을 피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망간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이바위로 올라가 나만 홀로 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변윤중의 아내인 함풍 성씨도 남편도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무엇하랴.”라며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변윤중의 아들인 변형윤과 며느리 장성 서씨가 부엉이 바위로 가니 부모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에 변형윤도 부모 뒤를 따르려 하자, 장성 서씨는 당신은 이 집안의 외아들인데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후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당신대신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린 뒤 자신도 시부모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

 

▲황주 변씨 삼강정려각
▲황주 변씨 삼강정려각

이후 1892년에 고종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열사들을 찾아내어 표창하도록 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조종필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부인 성씨를 열녀로, 며느리 서씨를 효부로 포상을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윤중을 이조참의로 증직하고 그의 부인과 며느리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지금도 봉암서원의 근처에 이들을 기리는 삼강정려각이 남아 있다.

장성 장암 마을을 들어서면 아늑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뒷산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고 앞쪽은 논들이 있어 일찍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임을 풍수를 모르더라도 알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 변이중유물기념관이라는 시징정이 서 있고, 봉암서원은 누구나 안아줄 수 있는 단아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다행히 후손들이 관리를 잘하고 있어 다른 서원보다는 안정감이 묻어났다.

변이중과 그 집안 사람들은 정묘호란까지 의병으로 나선다.

그들의 의로운 죽음을 종앙사에 배향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또한 삼강정력각의 내력에서 전쟁에 패한 후 황룡강에 목숨을 던진 변윤중 부부.

그리고 며느리의 이야기를 접하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저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연말에 다시금 나라사랑과 의병정신을 되새겨 볼 일이다.

▲김남철 이사/나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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