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하라, 지역을 지켜라!

2021년 '소의 해'는 어떻게 기억될까.

연말이 다가오니 한해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끝나는 것 같다.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고, 방역 지침이 생활화되어 코로나는 종식되리라는 예상을 했다.

위드 코로나.

생소한 용어까지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갑자기 다시 코로나 확진자가 속출되고 방역 패스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여 다시 일상 생활을 제한하는 시절이 되었다.

역병.

역사를 되새겨보면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해서 "역병은 전쟁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는 바이러스 전쟁을 하고 있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혼란과 국난 앞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해온 지혜와 의지가 있었다.

다시금 임진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남도의 의병들의 정신과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난세를 헤쳐가는 교훈이자 진리이다.

이번에는 남도의 중심에 위치한 '영암의병장들'을 찾아 나선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고, 지역사에 소홀히 하다 보니 처음 듣거나 생소한 의병장들이다.

임진전쟁은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행된 전쟁이다.

특히 '정유재란'은 호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으로 곧바로 남해바다를 거쳐 전라도 연안으로 침략했다.

저마다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향보의병들의 활동은 정말로 감동적이다.

가족과 집안, 그리고 지역민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으로 지역을 지켜냈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은 영암.

영산강 지중해의 중심 지역으로 교류와 개방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거기에 박대기, 박흡, 박형준 의병장들이 있다.

고경명 부자와 함께 한 박대기 의병장

영암 구림마을에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져 450여년을 이어 온 구림대동계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동계의 모임 장소인 '회사정'과 '구림대동계' 문서 등이 대표적이다.

▲구림마을 대동계 연혁비
▲구림마을 대동계 연혁비

구림마을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를 위하여 생겨난 자치조직인 '구림대동계'는 박대기(1537~1601) 등 함양 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기존에 존재해 왔던 조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박대기는 1537(중종 32)에 구림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녹야이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고경명의 충정에 감복하여 그의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강진현감 신충일·해남현감 변응정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격문을 가지고 공주에 갔을 때, 이미 고경명은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이에 박대기는 크게 슬퍼하며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려 고경명을 추모하였다.

이후 고경명의 아들인 고종후가 복수의병장이라는 기치를 달고 의병을 일으키자, 박대기는 그를 따르며 계원장으로서 여러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러 다녔다.

하지만 모병 활동을 하던 중 고종후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대기는 고경명 및 고종후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큰 한으로 생각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직장 벼슬을 제수하였지만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박대기는 그의 두 아들인 박장원(1560~1592)·박승원(1562~?)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3부자가 의병 활동을 했던 흔치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큰 아들 박장원은 고경명을 돕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다가 길에서 병으로 죽었다.

둘째 아들 박승원은 아버지인 박대기를 따라 고경명·고종후 부자와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정유전쟁 때에도 나주의 임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순천과 벌교 일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박승원은 이순신의 밑에서 계원도유사를 하며 전투를 지원하였으며, 이괄의 난 때에도 인조를 지키기 위해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75세의 고령으로 고향의 지사인 조행립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며 군량미 수송에 힘쓰기도 했다.

하지만 청과의 화친으로 어쩔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여 영암으로 돌아왔다.

그 후 아버지 박대기가 일군 구림대동계 활동을 하며 향인을 교화하며 만년에도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칼로 하인의 팔을 내리친 박흡 의병장

호남 3대 명촌으로 손꼽히는 구림마을에는 '육우당' 건물이 있다.

형제 여섯 사람이 한 방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육우당'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영암군 덕진면이 한석봉의 외가라고 하는데, 아마 한석봉은 어린 시절을 영암에서 보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육우당'은 박흡(?~1593)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태어났던 곳이다.

▲영암 구림마을 육우당
▲영암 구림마을 육우당

박흡은 구림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박흡은 자신이 태어난 곳인 '육우당'을 그대로 호로 사용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기충천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박흡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1593년에 김천일이 진주성에 가자고 하니 박흡은 바로 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박흡의 종이었던 노락금이 일본군의 기세가 매우 강한 것을 듣고, 박흡이 타고 있는 말의 재갈을 붙들어 잡고 가지 못하게 했다.

이를 본 박흡이 화가 나서 적을 보고 도망치는 것은 열사가 아니다!”라며 노락금의 왼쪽 팔을 칼로 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락금이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재갈을 잡자 박흡이 칼로 남아 있는 오른 팔을 친 후 진주성으로 향했다.

이후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김천일과 함께 순절하였다.

박흡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결국 초혼장으로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죽음으로 명량 바다를 지킨 박형준 의병장 3부자

1597년에 벌어진 명량해전은 임진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전투로 평가된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이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맞아 물리친 전투이다.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과 울돌목의 지리석 특성을 이용하여 일구어 낸 3대첩 중의 하나라 평가받는다.

하지만 명량해전의 승리는 이순신만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순신의 업적은 당연히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하겠으나, 영화 <명량>에도 다루어져졌던 것처럼 명량해전의 승리는 그를 따르는 여러 의병들과 지역민들이 힘을 합하여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인물이 박형준(1548~1597) 의병장 3부자이다.

박형준의 호는 구무제이며, 1548(명종 3)에 태어났다.

박형준은 과거 급제 후 예안 현감으로 재직할 때 향곡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박형준 의병장 예안 현감 추증 교지
▲박형준 의병장 예안 현감 추증 교지

하지만 그는 계속 영암에서 은거하면서 왜적의 침입이 잦아지는 것을 보고 두 아들인 박효남(1567~1597)과 박호남(1570~1597)에게 무예를 익히게 하며 후일을 대비하였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박형준 3부자는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여러 활동을 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3부자가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조정에서는 3부자의 충절을 기려 모두 선무원종공신을 내려 주었다.

또한 후세에 영암 유림들이 박형준 3부자의 행적을 조정에 알렸고, 이에 1860년에 '삼충각'이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박형준 의병장 3부자의 영암 삼충각
▲박형준 의병장 3부자의 영암 삼충각

정의롭고 당당한 의병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지난 해에 남도의 임진의병에 관한 학습자료를 만들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답사와 탐방을 해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전남의 임진의병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이름없는 수많은 의병들.

남도 어느 곳을 가도 나라와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의병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 못했고, 가르치지 않았고, 외면해 왔다.

백천간두 패망까지 몰린 조선을 지킨 의병들은 얼마나 외롭고 속상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우와 사당이 세워져 집안과 후손을 중심으로 기억 계승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관심과 지원이 없으니 관리도 한계에 부딪혀 쇠락해가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의병장들의 사우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찾지 않고 오지 않으니 문은 잠겨있고, 또 안내판은 지워진 채로 외롭게 서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필자는 이제라도 지자체의 지원과 함께 학교의 지역사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롭고 당당한 '남도의 의병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김남철 이사/나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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